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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우리가 잘 모르는 비하인드 스토리 본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에게 역사가,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신채호가 소설가였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 않죠.
사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을 저술한 역사가이자,
신민회와 의열단 등 독립운동 단체와 연관된 독립운동가일뿐 아니라,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이란 소설을 쓴 문학가랍니다.
어떤 인물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인물의 여러 면모나 행적을 두루 살펴봐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단재 신채호 선생님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단재 신채호의 유년 시절부터 20대
1880년 충청도 유생의 집안에서 태어난 신채호는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1898년에는 상경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답니다. 성균관이란 조선시대의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데, 지금의 대학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튼 신채호는 성균관 시절에서부터 독립협회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1905년에는 성균관 박사(성균관 선생님, 교수)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었습니다.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지요.
언론인으로 활약하던 신채호에 대해 이광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나 되는 단재는 풍채가 초라한 샌님이나 이상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되었다. 누가 핀잔을 주려 하면 ‘그러면 어때요’라며 여전했다. 남 말을 듣고 소신을 고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얘기할 땐 다정스러웠다.”
불의에 굽히지 않고, 주관이 뚜렷한 신채호 선생님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해외로 망명한 뒤, 적극적인 독립운동기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1907년 창립된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해외로 망명했습니다. 신민회에서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계획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신채호 선생님은 1910년에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가 1915년에는 중국으로 갔습니다. 주로 북경에서 지내면서 급진적 민족주의자로 무장 투쟁 노선을 견지했던 신채호 선생님은 1920년 이후 무정부주의 연맹에 가입했답니다. 거기에서 활동자금을 마련하다가 1928년 일제의 헌병대에 체포되었는데, 십년형을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1936년 옥사를 했습니다.
(당시 여순감옥에는 많은 독립투사들이 수감되었는데, 안중근 의사도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셨답니다.)
문학가로서의 신채호
신채호 선생님의 문학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째, <을지문덕>, <이순신전> 등 역사, 전기 문학을 쓴 시기입니다.
개화기 시절, 단재 신채호는 주로 논설과 역사, 전기 문학 작품을 썼습니다. 이때의 작품들은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등 다른 민족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던 영웅들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강렬한 민족의식을 심어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님은, 작품 속에서 묘사나 서술보다도 웅변하는 듯한 목소리로 호소를 했습니다. <을지문덕>의 한 대목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행이다. 을지문덕이여. 그래도 이 몇 줄의 역사가 흘러흘러 전해왔으니. 불행하다. 을지문덕이여. 겨우 이 몇 줄의 역사만 흘러흘러 전해왔으니. 대저 역사가 전해지거나 말거나 그 사람에게 있어서야 무슨 손해가 있고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지만 한 나라의 강토는 그 나라의 영웅이 몸을 바쳐 장엄하게 한 것이며, 한 나라의 민족은 그 나라의 영웅이 피를 뿌려 보호한 것이다. (중략) 그 나라의 영웅을 그 민족이 알지 못한다면 그 나라가 어떻게 정말 나라가 될 수 있으랴.”
신채호 선생님의 역사 소설은,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가 관객들을 향해 호소하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둘째, <꿈하늘>과 같은 민족운동가가 등장하는 작품을 쓴 시기입니다.
신채호 선생님이 중국으로 건너간 뒤 나타난 작품들에는 민족운동가가 등장합니다. 이 시기는 샌채호 선생님이 북경대학을 드나들며 역사 역구에 몰두하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집필한 시기이기도 하죠.
이때 단재 신채호는 민족운동가의 모험을 통해 독립 투쟁 가운데서 발생하는 온갖 오류와 난관을 극복하고 자주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판타지 기법으로 나타냈답니다.
셋째, <용과 용의 대격전>과 같이 무정부주의 사상이 드러난 시기입니다.
1923년 단재 신채호는 사상적인 변모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때 단재 신채호는 민족적 선각자나 영웅보다는 스스로 깨달은 민중이 스스로의 역량으로 일제를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조선혁명선언>을 쓰게 됩니다.
이 시기에 신채호가 썼던 소설들은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가, 언론인, 문학가, 독립운동가 로서의 단재 신채호를 살펴보았는데요,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모든 행적이, 그가 목표했던 삶과 그 궤적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게,
참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물론 한 사람의 글은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따르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참 많거든요.
말로는 도덕과 정의를 논하면서도,
실제로 살아가는 삶에서는 오히려 도덕과 정의에서 벗어난 경우도 있으니까요.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훌륭한 신념, 그리고 일관된 신채호 선생님의 삶...
그것을 통해 잠시만이라도 나를 되돌아보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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