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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대승의 주역, 홍범도 장군에 대해 알아볼까요?

별뜨락 2021. 8. 30. 22:49

78년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

얼마전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식과 안장식이 거행되면서, 봉오동 전투 대승의 주역 홍범도 장군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것 같은데요,

여기에서는 봉오동 전투를 커다란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어린 시절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요, 

홍범도 장군이 태어난지 7일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9살 되던 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답니다. 

천애 고아가 된, 어린 홍범도는 먹고 살아야 하기에 양반집 머슴으로 들어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15살이 된 홍범도 장군은 평양 감영(조선시대 각도의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의 나팔수로 군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입영을 한 홍범도 장군. 어쩌면 그곳에서 홍범도 장군은 소박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삶을 꿈꾸어보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홍범도 장군은 군교들의 행패와 부정, 부패를 목격하고 말았답니다. 결국 홍범도 장군은 학대와 비리를 참다 못해 상관 한 명을 구타한 뒤 병영을 탈출하게 되었답니다. 

 

 

   홍범도 장군의 청년 시절

군에서 탈출한 홍범도 장군은 제지소에서 3년간의 노동자 생활 끝에 1890년부터는 출가하여 신계사의 승려가 되었는데요, 이 시절이 홍범도 장군의 인생에서는 중요한 시기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때 홍범도 장군은 글을 깨우치는 등 역사교육을 받게 되었는데요, 특히 지담대사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선조들의 활약상을 들으면서 항일의식도 더욱 커졌다고 해요. 

홍범도 장군의 아내였던 이옥구 여사도 이 시기에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원래 이옥구 여사는 비구니였다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승려 생활을 5~6년 동안 하다가, 1895년 파계를 하고 이옥구 여사와 함께 환속했다고 해요. 그 이후 홍범도 장군은 강원도에서 소작농이 되어 농사를 짓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사냥 활동을 했답니다.  사냥꾼으로 활동하던 홍범도 장군의 총쏘기 실력은 소문이 자자했는데요, 홍범도 장군은 먼 거리에서 총을 쏘아, 유리병 입구를 통과하면서 병의 바닥을 맞히는 대단한 실력을 보유자였다고 합니다.

 

 

   

   국가의 위기에 의병 활동

 

1895년 을미의병 이후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는데요, 이때 홍범도 장군은 강원도에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답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의병 활동을 해왔던 홍범도 장군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이 되자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면서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07년, 일제는 총포기화류 일제단속법을 발령했는데요, 이 법안으로 인해 포수들의 반일의식이 더욱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요. 

총포기화류 단속법 :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 탄약,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 및 관청에서 거두어들임. 이를 위반하면 처벌. 

이 법안으로 인해 포수들은 사냥을 그만두며 이렇게 다짐했다고 합니다.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

 

의병 활동을 하면서 홍범도 장군은 '날으는 홍범도'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군과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어요. 이때 홍범도 장군의 활동을 대략 살펴보면 이와 같아요. 삼수성, 갑산읍 탈환 / 헌병분견소, 순사주재소, 우체국, 일본군 관사 등을 습격 소각 /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와 부호, 일본인 군관민 등 응징 처단 / 일본인 금광을 습격해 금괴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이용...

하지만 이런 승리를 이루기 위해 홍범도 장군은 커다란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답니다.

1908년 4월에는 아내인 이옥구 여사가 일제에 잡혀 모진 고문으로 옥사를 했고요, 

그해 6월에는 장남이었던 홍양순이 함경남도 정평배기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를 하고 만 것이죠. 

독립운동을 하느라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은 홍범도 장군.

이런 상황에서도 홍범도 장군은 의병활동의 재기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아부으며, 

어려워진 국내 활동을 타개하기 위해 연해주로 망명을 했는데요,

여기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망명해 의병활동을 했던 차남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는 걸 지켜보아야만 했지요.

 

 

   봉오동 전투

 

연해주로 망명한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 친일파와 일본 군경에 대한 유격전을 수행했답니다. 

그러던 중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인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으로 선출된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은 1920년 봉오동에서 6월에 전투를 치르고, 4개월 뒤에는 청산리 전투에 합류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답니다. 

 

봉오동, 청산리에서 계속된 패배를 하자, 일본은 계속해서 독립군조직을 추격해왔는데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독립군조직을 총망라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 여기에서 홍범도 장군은 부총재에 선임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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