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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네 집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 본문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는 한국과학사 연구의 선구자이신 전상운 선생님의 자서전이자 연구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후로, 전상운 선생님의 생애와 연구에 감동을 받았던 저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해 말, 드디어 선생님의 전기문 한 편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마 제가 쓴 전상운 선생님의 이야기가, 최초의 전상운 전기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각종 인터뷰, 신문 기사 등을 리서치하여 작성한 저의 글은 청소년을 독자로 설정하여 쓴 글이지만, 반드시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전상운 선생님의 이야기로부터 꿈과 도전 정신을 얻고 싶은 분들께 제 글을 소개합니다. (제 창작의 성의와 노력을 생각해주시어, 표절은 삼가해 주세요.)
우리가 몰랐던 과학 유산을 찾아서
- 과학 문화재를 찾는 나그네, 전상운 ('이카네 집' 주인이 지었습니다.)
1. 우리에게는 뛰어난 과학 유산이 있습니다.
만 원짜리 지폐의 뒷면을 보면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던 천문시계와 별자리 그림이 있습니다. ‘혼천의’라는 천문시계와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별자리 그림은 각각 국보 제 230호와 국보 제 228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가치가 큰 문화재입니다.
그러나 불과 오십 년 전만 하더라도 ‘혼천시계’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국보로 지정되기는커녕, 쓸모없는 골동품 신세였습니다. 다른 문화재들도 내버려진 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상운은 일찍이 우리 과학 유산의 우수성을 알아본 과학자였습니다. 곳곳에 방치된 과학 문화재를 찾아내어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세상에 알리는데 한평생을 바쳤습니다.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낸 전상운 덕분에 잊힐 뻔했던 수많은 과학 유산들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2. 어려움이 닥쳐도 꿈을 잃지 않은 소년
전상운은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전상운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우주 저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은 어디에서 온 걸까?’
전상운은 알고 싶은 게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전상운의 생각과 상상력은 하루가 다르게 커갔습니다. 전상운은 글쓰기에도 재능이 많았습니다. 학교에서 글짓기 대회가 열리면 상을 휩쓸다시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일본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만 나와서 일을 할 수 있게끔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는 건 힘들고 드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상운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은 과목이 생기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전상운은 원산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소학교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학교였습니다.
전상운이 중학교에 입학했던 1945년, 드디어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해 전상운은 자신의 꿈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훌륭한 과학자가 된다면 우리나라를 빛낼 수 있겠지?’
전상운은 해방되기 직전까지도 우리 겨레의 정신을 없애려 했던 일본을 떠올렸습니다.
일본은 우리의 말과 글을 못 쓰게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은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게 과학을 천시한 우리의 탓이라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전상운은 우리의 땅을 되찾은 다음에도 일본이 심어놓은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안타까웠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어, 우리도 과학을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
그 뒤로 전상운은 꿈을 이루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에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상운이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민족은 수많은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살아갔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그해 겨울, 전상운은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맏이였던 전상운은 부모님을 도와 피난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동생들을 챙겼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가까스로 견뎌 가면서 전상운과 그의 가족은 피난지였던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의 어느 부둣가에서 18세의 전상운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학생도 아니고, 가진 것도 없던 전상운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반드시 꿈을 이루고야 말겠어.’
전상운은 주먹을 꼭 쥐었습니다.
전상운은 또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전쟁의 슬픔을 이겨내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부두에서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고된 일을 하느라 손이 다 부르텄는데도, 일을 마치고는 그 손으로 책과 연필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2 년 뒤, 전상운은 서울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습니다.
3. 가슴 속에 품은 우리의 과학 유산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전상운은 시골에 있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상운은 공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공부를 한 것입니다. 공부를 하면서 궁금한 게 생기면 책방과 국립도서관을 찾아다녔습니다. 책을 어렵게 구하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상운은 책을 펼쳐서 새로운 사실을 만나는 게 기뻤습니다.
‘아,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어느 날 전상운은 책방에서 누렇고 거친 책을 보았습니다. 그 책은 우리의 과학 유산에 대해 알려주는 책(1946년에 발간된 홍이섭의 ⌜조선 과학사⌟)이었습니다. 처음에 전상운은 그 책이 낡고 시시한 책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대충 넘겨보았습니다.
그러던 전상운의 얼굴 표정이 점점 바뀌었습니다.
‘아니, 우리의 과학 유산이 이렇게 뛰어난 것이었다니!’
전상운의 눈은 놀라움으로 반짝거렸습니다.
전상운은 창경궁을 찾아 갔습니다. 책에서 읽은 우리의 과학 유산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려쬐는 창경궁으로 들어가자 전상운은 몹시 기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책에서 봤던 과학 유산을 못 보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빼앗았던 일본이 우리의 민족정신을 없애려고 창경궁을 망가뜨렸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창경궁 바닥의 돌을 모두 치우고 거기에다가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상운은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창경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창경궁을 샅샅이 살피던 전상운은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아, 저것은…….’
전상운의 눈앞에 별자리 그림(천상열차분야지도)이 펼쳐졌습니다. 그것은 500년도 더 전에 돌에다가 새긴 별자리 그림이었습니다.
전상운은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들이 바닥에 내려앉아, 낮에도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전상운은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낮에 보았던 아름다운 별자리 그림이 어른거렸습니다.
전상운은 더 많은 우리의 과학 유산이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창경궁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 덕수궁을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물시계가 있었습니다. 물시계에는 용이 새겨졌는데, 그 용이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용은 청동 항아리에서 힘차게 솟아나와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상운은 물시계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아, 세상에!’
물시계를 쳐다보던 전상운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는,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였습니다.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이처럼 정밀한 시계를 만들었던 나라는 없었습니다. 물시계는 아라비아와 중국에서 만들었던 시계와도 전혀 달랐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시계였던 것입니다.
전상운은 꼭꼭 숨겨놓은 보물을 찾은 것 같이 기뻤습니다. 그때부터 전상운은 우리의 과학 유산을 찾아 연구하는데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1960년 어느 봄날, 전상운은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미국에 있는 예일 대학교의 프라이드 교수가 쓴 편지였습니다.
"한국에는 오래 된 천문시계가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의 이름은 ‘혼천시계’입니다. 아주 중요한 연구 대상이지요. 혹시 전상운 선생님께서 이 천문시계를 알아봐주실 수 있으신가요?"
전상운이 쓴 글을 우연히 알게 된 프라이드 교수가 전상운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전상운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어쩐지 천문시계를 연구하다보면 우리 과학 유산에 대해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전상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프라이드 교수가 말한 천문시계를 알아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상운은 당장 천문시계가 있는 박물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잠도 거의 못 자면서까지 사진을 찍고 길이를 재었습니다.
이런 전상운을 지켜보던 몇몇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천문시계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고? 말도 안 되지.”
“이건 우리나라의 것이 아닐세. 그러니 괜히 헛고생하지 말게.”
그러나 전상운은 연구를 하면 할수록 ‘혼천시계’라는 천문시계가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전상운은 이토록 훌륭한 과학 유산을 사람들이 몰라보는 게 속상했습니다.
마침내 한 달 가까이 연구를 했던 전상운은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습니다.
“혼천시계는 1669년, 조선의 천문학 교수 송이영이 만든 것입니다.”
발표를 마치고 난 전상운은 굳은 다짐을 했습니다.
“우리 과학 유산의 가치를 세계에 알릴 거야!”
4. 우리의 과학 유산, 과학 문화재로 빛나게 하다.
전상운은 우리의 과학 유산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습니다. 때로는 무더운 여름 날 덜컹거리는 버스를 탔고, 때로는 추운 겨울 눈 쌓인 험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학 유산을 찾게 되면 전상운은 정확하게 자로 재고, 빠짐없이 기록한 다음, 자세하게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모은 자료를 가지고 전상운은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연구를 하는 데에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가르침을 받을 전문가와 책을 구하기가 힘들어서였습니다. 또 옛 문서가 나왔을 때는 해석을 하느라 쩔쩔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전상운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연구를 하다가 궁금한 게 생기면 누구든지 찾아가 물어보았습니다. 필요한 책이 생기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라도 책을 구했습니다. 그러면서 거의 매일 밤을 지새울 정도도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연구한 게 하나씩 늘어가니, 이걸로 책을 만들어야겠어.’
1966년 전상운의 책(⌜한국 과학 기술사⌟)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7년 동안 연구한 것을 모아 만든 책이었습니다. 이 덕분에 우리 과학 유산의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상운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우리 과학 유산을 제대로 알리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전상운은 과학 유산을 찾아 헤맬 때 보았던 몇몇 장면들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창경궁에는 별자리 그림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도시락을 먹는 가족들과 모래를 뿌리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에서조차 과학 유산은 장롱 한쪽 구석에 들어있거나, 책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훌륭한 과학 유산이 방치되어 있던 것입니다.
전상운은 마음이 답답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전상운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게 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어두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야.’
전상운이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창덕궁의 학자들이 흩어지자 우리의 과학 유산은 잡동사니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많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의 과학 유산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해방이 된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나아진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과학 유산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민족정신을 없애려고 일본이 심어놓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빛나는 과학 유산이 있다! 이것을 우리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를 빼앗겼던 때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없애야 한다!’
전상운은 일본어로 되어 있던 과학 유산의 이름 대신 고운무늬청동거울, 새김무늬청자 등과 같은 우리말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또 일본이 가져갔던 과학 유산을 되찾아 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전상운은 일본에 있던 휴대용 별시계(아스트롤라베, 1787년 유금 제작,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휴대용 별시계)를 직접 사서 다시 우리나라로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상운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과학 유산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게 없잖아!’
그때부터 전상운은 과학 유산이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전상운은 뜻이 있는 학자들과 모여 과학 유산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또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과학 유산을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전상운이 공을 들이는 동안 여러 분야에서 우리의 과학 유산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전상운은 암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전상운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85년 여름날, 드디어 전상운이 제안했던 과학 문화재 18개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과학 문화재가 나라에서 정한 문화재가 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시작한 일이 결실을 거둔 것입니다.
5. “저는 과학 문화재를 찾는 나그네입니다.”
그 뒤로 시간이 한참 흘렀습니다. 전상운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발로 뛰면서 과학 문화재를 찾아다녔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했습니다.
전상운은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외솔상, 국민훈장, 동백장, 세종문화상,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등을 받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국제천문연맹에서 인정한 소행성 이름 중에는 20여 개의 한글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 중에 전상운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세종, 장영실, 최무선과 같이 과학적 업적이 뛰어난 옛 위인들의 이름이 대부분입니다. 전상운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천문가가 소행성에다가 그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지금도 전상운의 이름을 딴 소행성은 밤하늘을 밝히고 있습니다. 과학 문화재를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쳤던 전상운의 땀과 눈물에 찬사를 보내는 듯 묵묵히 빛나고 있습니다.
가끔 전상운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과학 문화재를 찾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던 전상운이 2018년 1월 15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전상운의 죽음을 슬퍼하며 전상운의 삶에 존경을 나타냈습니다.
지금은 과학 문화재가 교과서에 실려 있고, 과학관이나 박물관에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상운이 아니었다면 과학 문화재는 자칫 역사의 그늘 속으로 잊힐 뻔 했습니다. 전상운이 있었기에, 과학 문화재를 더욱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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