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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운수좋은날, 제대로 읽기

별뜨락 2019. 1. 24. 22:16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1924년 발표된 이후로, ‘운수 좋은 날은 반어법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제목은 운수 좋은 날이지만, 주인공에게는 운수 좋은 날과는 정 반대의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운수 나쁜 일은, 결말에 갑자기 생뚱맞게 벌어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운수 좋은 일만 일어나다가 마지막에 커다란 비극이 들이닥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설을 읽게 되면, 초반부터 날씨, 집안의 분위기 등이 뭔가 수상합니다.


새침하게(제법 쌀쌀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오고, 얼다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다.”


이 대목은 소설의 제일 첫 문장입니다. 이게 만약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잘 되실 것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제법 쌀쌀한 날씨에 얼다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걸 본다면 어떨까요? 뭔가 으스스하고 어두운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주인공 김첨지가 등장합니다. 김첨지의 직업은 인력거꾼입니다. 작품이 쓰여지던 시기에 인력거꾼들은 도시의 하층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아가는 도시 하층민의 삶은 어땠을까요? 그들의 삶은 매우 열악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밥을 굶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김첨지의 아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프지만 가난해서 병원 한 번 못 가보고 기침만 쿨럭거리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가 기침으로 쿨룩거리기는 벌써 달포가 넘었다. 조밥도 굶기를 먹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물론 약 한 첩 써본 일이 없다. 중략합니다. 의사에게 보인 적이 없으니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으되 반듯하게 누워 가지고, 일어나기는 새로 모로도 못 눕는 걸 보면 중증은 중증인 듯. 병이 이토록 심해지기는 열흘 전에 조밥을 먹고 체한 때문이다. 그때도 김첨지가 오래간만에 돈을 얻어서 좁쌀 한 되와 10전짜리 나무 한 단을 사다주었더니 그 (아내가) 천방지축으로 냄비에 대고 끓였다. 마음은 급하고 불길은 달지 않아 채 익지도 않은 것을 그 (아내가) 숟가락은 그만두고 손으로 움켜서 두 뺨에 주먹덩이 같은 혹이 불거지도록 누가 빼앗을 듯이 처박질하더니만 그날 저녁부터 가슴에 당긴다, 배가 캥긴다고 눈을 흡뜨고 (그냥)병을 하였다.”

 

날씨도 을씨년스럽고, 아내까지 심각하게 아픈 상황인데, 김첨지에게 자꾸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점지에게 오랜만에 운수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첫번에 30. 둘째번에 50.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10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 날 이때에 이 80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 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김첨지는 이상하게 돈이 잘 벌리니까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김첨지는 그것에 대해 마냥 좋아하지는 못합니다. 뭔가 불안하고 찜찜한 마음이 그에게 불쑥불쑥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김첨지 마음속의 즐거움과 불안감은 계속 반복됩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주인공 김첨지와 같은 일을 겪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끔찍하게 나쁜 일이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몰라서 불안하고 초조한데, 이상하게도 하는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일이 잘 되어도, 마음 속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첨지는 자신의 불안감을 잊고 싶어서 선술집에 가게 됩니다.

술에 잔뜩 취한 김첨지는 설렁탕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사흘 전부터 김첨지의 아내가 설렁탕 국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을 들어서는 순간 김첨지는 더욱 불안해집니다. 집안에는 전과 다른 정적이 흘렀습니다. 아내의 쿨룩거리는 기침 소리도 거르렁거리는 숨소리도 전혀 들리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작가는, 집안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은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첨지는 이 불길한 침묵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전과 다르게 고함을 질러댑니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 무시무시함을 쫓아버리려는 허장성세인 까닭이다.”

 

마침내 방안에 들어선 김첨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게 아내의 죽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내의 다리를 차고, 머리맡으로 달려든 다음 아내를 향해 말을 합니다.

 

왜 나를 바루 보지 못하고 천장만 보느냐, ?”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첨지의 비극적인 상황은 그날의 행운과 겹치면서 더욱 비극적으로 끝맺음합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아무리 운수 좋은 일이 있더라도, 그건 진짜 운수 좋은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현진건은 식민지 하층민의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운수 좋은 날의 곳곳에서도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김첨지의 고통을 실감나게 드러내줍니다. 현진건의 이러한 능력은 1920년대의 그 어느 작가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현실의 모순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꼼꼼하게 그려내려고 했던 현진건이 이루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진건은 조선혼과 현대 정신의 파악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조선 문학인 다음에야 조선의 땅을 든든히 딛고 서야 한다. 현대 문학인 다음에야 현대의 정신을 힘 있게 호흡해야 한다. 까마득한 미래의 낙원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손을 벌리면 잡을 수 있는 눈앞에 피어있는 한 떨기 개나리가 봄의 소식을 전하지 않느냐. 로만티시즘도 좋고 리얼리즘도 좋다. 상징주의도 나쁜 것이 아니고 표현주의도 버릴 것이 아니다. 오직 조선혼과 현대 정신의 파악. 이것이야말로 우리 문학의 생명이요 특색이다. 고지식한 개념이나 수고로운 모방에서 한걸음 뛰어나와 차근차근하게 주위를 관조하고, 고요하게 제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문학의 운명이다.”

 

현진건의 말처럼 현진건은 차근차근하게 주위를 관조하면서 김첨지라는 도시 하층민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첨지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당하며 살아가는 김첨지가 있을 것입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제대로 읽은 분이라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오늘의 김첨지를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그것을 통해 느껴지는 심장을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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