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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혼돈으로 빚어낸 이방인의 얼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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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혼돈으로 빚어낸 이방인의 얼굴>

별뜨락 2019. 5. 2. 20:20

나는 한때 이방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잊혀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한동안 나는 내가 이방인이었다는 걸 망각하고 지냈다. 겹겹이 숨어있던 내 이방인 시절의 기억. ‘영원한 이방인을 집어 들지 않았다면, 나는 기억의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좀처럼 빗장을 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 전 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그때 나는 낯선 나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설레는 가슴이 요동치는 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게 떠오른다. 출국 직전까지도, 앞으로의 내 삶은 풍요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게 될 줄 알았다. 나는 그동안 나의 삶이 속했던 세계에 작별을 고했을 뿐만이 아니라, 내가 내렸던 뿌리를 거두어 새로운 곳에 내리게 할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그곳에서 나는 헨리 파크였고, 헨리파크의 부모님이었으며, 헨리파크 집에서 거주하던 아줌마였다.


내가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지냈던 경험이 없었다면, 내가 이 책에 그토록 깊이 공감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해석이 어려운 타국에서의 독특한 어려움을 발견하고, 헨리 파크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형상화했다.

 


헨리 파크이자 박병호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줄곧 미국에서 자랐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미국 백인 여자와 결혼을 한 헨리는,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미국 중산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날 헨리의 아내는 그에게 목록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내가 남긴 목록에는당신은 B+ 짜리 학생, 불법 외인, 정서적 외인, 낯선 사람, 스파이 등과 같은 가혹한 평가로 가득했다. 아내와의 불화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존 강의 뒷조사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헨리는 뉴욕의 사설탐정소에서 스파이였던 것이다. 존 강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발생하는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헨리는 의식은 릴리아, 세상을 떠난 아들, 아버지, 어머니, 가정부 등에게로 흐르며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렇다면 헨리가 방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민족공동체의 언어와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언어가 다른 데에서 비롯한다

언어학자였던 주시경 선생은, 민족이 본질적으로 언어 공동체이며 언어가 사회를 조직한다고 했지만, 헨리는 민족의 언어와 사회의 언어가 분리된 상황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헨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는 근소한 발음의 차이조차도 현격한 차별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도망치고 싶은 땅이 그에게는 안식처라는 점에서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방황과 혼란은 아들의 죽음, 아내와의 불화, 존 강의 몰락을 통해 더욱 깊어졌다. 헨리는 그의 아들, 미트가 자신과는 달리 영어에 속한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미트는 동네 아이들에게 프라이팬처럼 넓은 얼굴이라는 놀림을 받고, 신체적인 괴롭힘까지 당했다. 그러다가 미트는 끝내 아이들의 도를 넘은 장난에 의해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꽤나 아름다운 아이였고, 무서울 때면 부끄러움도 모르고 부부 사이로 끼어들었으며, 부부가 다투면 훌쩍이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잃은 헨리와 아내는 분노와 우울의 시간을 보내다가, 불화에까지 이르렀다.

아내가 그를 떠나고 나서, 그는 존 강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막강한 위치에 있던 존 강은 곧 미국의 주류 사회로 편입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존 강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강과 같은 사람이 뭔가 더 큰 것을 시도하면 즉시 의심을 받지요. 그래서 누군가가 다가와서 돈을 주고 우리 같은 하이에나들을 들여보냅니다.” 어느 날 일어났던 사무실 폭파 사건은 도미노처럼 다른 사건들로 번져나갔고, 결국 존 강은 철저하게 무너지며 미국을 떠나버렸다.

존 강이 미국을 떠난 뒤, 헨리는 스파이 생활을 그만두고 언어치료사인 릴리아의 수업을 도왔다. 릴리아와 헨리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릴리아는 영어 발음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언어치료사이며, 헨리는 태생적으로 영어 발음에 문제가 있는 이민자의 아들이다. 역설적인 그들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릴리아와 헨리의 관계를 비극적으로 마무리하지 않았다. 릴리아와 헨리는 혼돈 위의 어디쯤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의 씨앗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헨리는 릴리아와 함께, 영어가 서툰 아이들에게 말하는 두려움을 없애도록 도와주게 되었다. 그러면서 헨리는 조금씩 변화했다. ‘한인 노동자가 말하는 우스꽝스럽고 딱딱한 영어조각을 듣고 조롱했던 그, 콩글리쉬를 듣고 움츠러들고 창피하고 화가 났던 그가 달라져, 마침내 그는 이 도시에서 아버지의 언어를 들어보려고 언제까지나 귀를 쫑긋거릴 것이다.”는 의지를 드러내었다. 여태껏 미개척의 언어였던, 한민족의 언어에 그가 성큼 다가선 순간이었다.


과연 헨리는 지독한 혼란에서 벗어나게 되었을까? 작가는 작품 속에서 상황을 통해 작중인물의 내면을 표현할 뿐, 그 의미를 파악하는 건 독자의 몫일 것이다. 나는 어쩐지 아버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게 된 헨리가, 자신이 정체성의 혼란을 다스릴 수 있게 될 것 같다.


이제 다시 미국에서 지냈던 나의 과거를 복원해본다. 혼돈으로 빚어낸 이방인의 얼굴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혼돈으로 빚어낸 이방인을 마주하면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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