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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통제력을 강화한 통일 신라와 발해

별뜨락 2022. 4. 18. 23:17

1. 신라의 삼국 통일

(1) 과정 : 고구려의 수·당 격퇴, 백제·고구려 연합해 신라 공격

나당 동맹 체결(648) 나당 연합군의 백제 사비성 함락(660)

고구려 평양성 함락 (668)

당과 전쟁 벌여 당 축출, 삼국 통일 (676)

 

(2) 통일 전후 왕실 변화 : 통일 과정에서 진골 출신 태종 무열왕 즉위, 이후 무열왕 직계 자손이 왕위 계승(진덕 여왕을 끝으로 성골 사라져 진골 출신 김춘추 왕위에 오름. 이후 혜공왕에 이르기까지 무열왕 후손들이 왕위 계승)

무열왕·문무왕의 왕권 강화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신문왕의 장인이었던 김흠돌이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과 반역 도모) 계기로

진골 귀족들 숙청하여 강력한 왕권 확립

 

2. 통일 이후 신라의 통치 체제 정비

(1) 중앙 통치 체제 : 강력한 왕권 아래 관료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비

-왕의 직속 기구로 집사부를 두었고, 집사부 장관인 시중(중시) 역할 강화,

-사정부·외사정 등 감찰 기구 설치(관리 부정과 비리 단속),

-국학 설립(유학 교육, 왕에게 충성하는 인재 양성),

-진골 세력 약화되고 6두품 세력 역할 강화(왕의 정치적 조언, 중앙행정 실무 담당)

관료제 신문왕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 지급,
녹읍(지급 받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 + 노동력 징발 가능) 폐지·녹봉 지급
귀족 세력 약화
(수조권이란? 토지에서 조세 거둘 수 있는 권리 의미. 관리들에게 수조권 주고 관리가 직접 징수)
골품제 통일 이후에도 골품제 유지되어 관료제 운영 제약
하지만 3두품 이하의 골품 구분은 점차 사라짐
왕경 (왕이 사는 수도)의 호칭 : 금성 금경 · 대경 (지방과 구분)
궁성을 크게 넓혀 왕실의 위상 높였다.

(2) 지방 통치 제도 : 95소경 체제로 정비, 상수리 제도 실시해 지방 세력 견제

9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 군과 현
-왕은 군현에 지방관 파견

5소경 지방 행정의 요충지에 설치하여 수도 금성이 동남쪽에 치우친 점 보완,
지역의 고른 성장 도모, 고구려 유민·백제 유민의 빠른 정착 지원
기타 · 부곡 : 특수 행정 구역
: -여러 마을을 촌으로 삼고, (여러 개의 촌을 군현으로 삼았다)
-지방관 통제 아래 촌주가 행정 담당
-촌주에게 3년 마다, ‘신라 촌락 문서작성하도록
신라 정부가 조세와 노동력 거두는 데 활용)

(자료) 통일 이후 신라의 지방 통치 방식

상수리 제도
문무왕의 이복동생 거득공이 민정 시찰하기 위해 무진주에 이르니 주의 향리 안길이 그를 극진히 대접...안길은 나라에서 실시한 제도(매년 각 고을의 관리 한 사람이 금성에 있는 관청으로 올라오게 하는 제도)에 따라 금성으로 올라왔다. 안길이 거득공을 찾아가자 거득공이 잔치를 베풀었다.
신라 촌락 문서
일본 도다이샤 쇼소인에 소장된 화엄경론의 경질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 인구는 6등급 파악, 가호는 9등급 파악
-촌주를 수도에 머물게 함
-목적 :(통일 이후 고구려, 백제 세력 포용하면서-자습서)
지방 세력 견제
촌주가 조사한 항목 및 이유 : 촌락의 인구, 가축의 수, 토지의 종류와 면적, 과실나무 수 등 조사
신라 정부가 조세와 노동력 거두는 기본 자료
통일 이후 신라가 정비한 지방 통치 방식 :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여 지방 세력을 통제하고 촌락의 토지, 인구, 토산물 등을 조사하여 수취의 근간으로 삼았다.

 

3. 신라 말 지배 체제의 동요

(1) 정치적 동요 : 8세기 후반 혜공왕 피살 후 진골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 발생(웅주 도독, 김헌창이 자신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반란, 청해진의 장보고도 중앙의 왕위 쟁탈전에 가담)상대등의 권력 다시 강화, 귀족 연립에 의한 국정 운영 / 6두품 세력의 반신라적 성향(이유: 진골 귀족의 권력 독점과 골품에 따른 관직 승진의 한계로 자신의 능력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해서)

 

(2) 사회 흔들리자 흥덕왕 : 사치 풍조 금지하고 골품에 따라 차등 둔 생활 양식 지키도록 규제

<참고: 흥덕왕 교서 -흥덕왕 교지를 내려 말하였다... 백성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진기한 외래품만 좋아한 나머지 순박한 우리 것 싫어한다. ... 법령을 선포하노니 이를 어기면 형벌을 내릴 것>

 

(3) 사회 혼란 : 정부의 무거운 조세 수취, 귀족들의 농민 수탈농민 봉기, 지방 호족 성장(스스로 성주·장군을 칭함, 지역의 행정·군사에 대한 실질적 통치력 행사)

 

(3) 후삼국의 성립 : 유력 호족이 후백제, 후고구려 건국,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

 

4. 발해의 성장과 멸망

(1) 발해의 발전

건국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 말갈인을 이끌고 만주 동모산에서 건국 (698), 고구려 계승 의식
발전 무왕: ‘ 인안 연호 사용, ·신라 견제, 당의 산둥 지방 공격
문왕: ‘대흥연호. 대왕’, ‘황상칭호 사용, 당과 우호 관계 맺음, 새로운 수도 상경성(당의 장안성 본떠)건설
선왕: 최대 영토 확보,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으로 불리며 전성기 이룩
멸망 10세기경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국력 쇠퇴거란에 멸망(926)

(2) 발해의 통치 체제 정비

중앙 통치 체제 :

당의 36부제 기반으로 정비했지만, 명칭과 운영에서 독자성

- 왕 아래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둠.

- 정당성 아래 6부를 둘로 나누어 관할

- 6부 명칭에 유교 이념 반영

 

지방 행정 제도: 51562주로 정비, 도독·자사 등 관리 파견,

촌락의 우두머리(수령)를 중앙 지배층으로 받아들이거나 촌락 행정 맡김

남북국 시대 : 신라 북쪽에 발해 건국되면서 신라와 발해가 양립하는 남북국 형세실학자 유득공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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