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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네 집
(3.1절 기념 고학년 동화) 운명의 26일 본문
10월 26일과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와 관련이 있는 날입니다.
26일…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께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고,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께서 순국하신 날이지요.
'운명의 26일'이라는 작품은, '안중근 의사의 26일'에 얽힌 창작동화랍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안중근 의사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직접 창작한 동화이지요.
'이카네 집'을 방문하신 분들께서도 이 글을 보시면서
잠시나마 안중근 의사에 대해 생각해보시는 시간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
글을 올려봅니다.
비록 뛰어난 글은 아니지만, 안중근 의사에 대한 마음을 담아 올려놓은 글입니다.
'이카네 집'의 열정과 노력을 생각하시어, 표절이나 퍼가기는 삼가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려요.
1
10월 26일, 하얼빈의 아침은 쌀쌀했다. 기석이는 조그마한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하얼빈 역으로 모여들었다. 하얼빈 역은 대체로 붐비는 곳이지만, 이렇게 일찍부터 사람들이 북적이는 건 흔하지 않았다.
‘무슨 잔칫날이라도 되는 것 같아!’
기석이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기석이의 눈에 러시아 헌병대들이 들어오자, 기석이는 몸이 움츠러들었다. 가뜩이나 몸집이 왜소한, 열다섯 살의 기석이가 더 작아보였다. 발목까지 오는 외투와 높은 털모자를 쓰고 있는 헌병대 한 명이 기석이 앞을 지나쳤다. 기석이는 손을 외투 안으로 찔러 넣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헌병대를 보니까 괜히 떨리네.’
기석이는 주머니 안에 있는 수첩과 펜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대동공보> 사무실에서 안중근 선생님과 신문사 편집장인 이강 선생님이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기석이가 <대동공보> 신문사 식구들과 함께 지내게 된 지 보름 만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를 타고 하얼빈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정말입니까?”
사무실 너머로 들리던 안중근 선생님과 이강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두 분의 목소리를 엿들으면서 기석이는 생각했다.
‘이토 히로부미라면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앞장선 일본 정치인이잖아! 그렇다면 이건 특종감이야!’
물론 기석이는 두 분의 이야기가 무엇에 대한 건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에서 훌륭한 기삿거리가 될 만한 뭔가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강 선생님이 안중근 선생님을 그렇게 급하게 신문사로 불러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 기석이는 결심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볼 거야. 그래서 그 누구보다 먼저 기사를 써내고 말겠어!’
성공한 기자가 되고 싶던 기석이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나이가 어린 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그날 밤 기석이는 사무실 밖으로 한참을 뛰어 나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맑은 별이 초롱초롱 떠 있는 밤하늘에 대고 기석이는 크게 소리쳤다.
“아버지! 아버지는 가족을 내팽개치면서까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셨죠? 저와 어머니가 어떻게 지냈는지 신경도 쓰지 않으셨잖아요!”
가쁜 숨을 몰아쉬던 기석이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허공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달라요. 가족이 굶주리는데도 나몰라하던 아버지! 병에 걸려 죽어가던 어머니에게 위로 한 번 못 해준 아버지!”
기석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입술이 파래지고 얼굴에 핏기를 잃어가던 어머니가 생각나자, 눈물이 기석이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저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기석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기석이는 두고두고 그 날이 생각났다. 기석이가 다니던 삼흥학교 선생님이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던 그 날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였다. 선생님은 의병대에서 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기석이는 그 소식을 듣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그게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한참 지나서까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기석이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빰빠라 빰빠 빠밤바 빠아.”
요란한 군악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플랫폼 한쪽에 자리 잡은 군악대가 연습을 시작했다. 군악대의 소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하얼빈 역의 소리들을 모조리 잡아 먹어버렸다.
오전 9시가 가까워지자 일장기를 꺼내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려는 일본인들이 틀림없었다. 기석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방문할 하얼빈 역 풍경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 순간 멀리서 기치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러자 군악대의 소리가 더욱 야단스러워졌다. 일장기를 꺼내든 손은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석이는 잠시 아찔했지만,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빠라빠라 빠라빠빰빠 빠아.”
기차가 멈춰 섰다. 잠시 후 러시아 사람 몇 명과 함께 일본인 몇 명이 내렸다. 모든 순간을 머릿속에 담고 싶은 기석이는,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던 중 낯익은 누군가를 발견했다.
‘왜 선생님께서 여기에 계시는 거지?’
그 분은 다름 아닌 안중근 선생님이었다. 안중근 선생님은 기석이가 예전에 다니던 삼흥학교를 세웠다. 얼마 전까지는 의병대 참모 중장이었다. 또 지금은 <대동공보>에 실리는 논설을 쓰고 있다.
‘아, 이강 선생님께서 안중근 선생님에게 이토 히로부미 기사를 부탁한 거였구나!’
기석이는 안중근 선생님도 자기처럼 이토 히로부미 기사를 쓰려고 하얼빈 역에 왔다고 생각했다.
‘안중근 선생님, 죄송하지만, 이 특종은 제가 쓸 겁니다!’
기석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였다. 안중근 선생님의 두 눈에서 번뜩 빛이 났다. 지금까지 기석이는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안중근 선생님의 눈에는 매섭고 강한 눈빛과 침착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함께 있었다.
기석이는 안중근 선생님이 누군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방금 기차에서 내린 일본인이었다. 그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걸, 기석이가 눈치 챈 순간이었다.
“탕! 탕! 탕!”
갑자기 이토 히로부미가 총 세 발을 맞고 쓰러졌다. 기석이는 너무 놀라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아니, 선생님이…….’
권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겨눈 건, 바로 안중근 선생님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안중근 선생님은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옆에 있던 일본인에게 총을 겨누었다.
“탕! 탕! 탕!”
3명의 일본인이 차례로 총에 맞았다. 그걸 보고 하얼빈 역 안에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하얼빈 역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기석이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꽉 물었다.
‘내 두 눈에다가 지금 일어난 일을 그대로 담아낼 거야!’
잠시 후 러시아 헌병이 안중근 선생님에게 달려들었다. 선생님은 권총을 내던지고, 이렇게 힘껏 외쳐 불렀다.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
그러자 ‘대한독립 만세!’라는 러시아 말이 하얼빈 역에 크게 울려 퍼졌다.
2
안중근 선생님은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그 뒤에 러시아 헌병 파견대로 끌려갔다.
‘안중근 선생님과 이강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게, 바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것이었다니!’
기석이는 무턱대고 러시아 헌병 파견대까지 와버렸다. 헌병 파견대 골목 구석에서 기석이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얼빈 역에서 기석이가 본 걸 기사로 꼭 써내겠다고.
기석이는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수첩에다가 적었다.
<10월 26일 - 안중근 선생님이 러시아 헌병 파견대에서 수색을 당하고 사진을 찍음>
기석이가 수첩과 펜을 다시 외투에 넣을 때였다.
‘부스럭’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기석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림자 하나가 골목으로 사라졌다.
‘뭔가 이상해.’
기석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스럭’ 조금 있다가 소리가 또 들려오자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여기를 피해야겠어.’
기석이는 소리가 나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다음 모퉁이를 돌아 러시아 헌병 파견대 뒷길로 빠져나갔다.
‘터벅, 터벅, 터벅’ 그 순간 거침없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기석이와 가까워질수록 커졌다. 드디어 기석이는 누군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기석이는 소리가 나는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으로 달려 나가던 기석이는 생각했다.
‘왜 나를 쫓는 거지? 혹시 안중근 선생님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내가 도왔을 거라고 오해하고 있나?’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빨라지자, 기석이는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기석이는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힘껏 달렸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쫓아오던 소리가 멈췄다.
‘휴, 다행이다.’
기석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기석이, 기석이니?”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기석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썹이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는 아줌마가 앞에 있었다. 아줌마는 머리에 쓴 스카프를 입까지 두르고 있었다.
기석이는 아무 말 없이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기석이 맞구나. 어디로 갔나 했더니, 하얼빈에 있었어.”
아줌마가 스카프를 빼내자, 기석이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삼흥학교, 이숙희 선생님이시잖아요!”
“그래, 기석아!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기석이를 바라보는 이숙희 선생님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기석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학교로 돌아갈래?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어.”
선생님의 말을 듣고 기석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생님은 지금껏 기석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기석이가 삼흥학교를 다닌 것도 선생님의 도움이 컸다. 그 뒤로 선생님은 어머니를 잃은 기석이가 학교를 떠나지 않도록 애를 써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준 다음에도 선생님은 기석이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님, 제가 공부 말고 일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대동공보’로 데려다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시잖아요.”
“그랬지. 그때는 네가 잠시 학교를 떠나 있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지내다보면 부모님을 잃은 슬픔도 잘 극복할 줄 알았지. 그렇지만 곧 학교로 돌아오게 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네가 ‘대동공보’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는 거야.”
“선생님, 저는 쓸데없는 공부가 싫어요.”
“그렇지만 기석아, …….”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석이는 말을 가로챘다.
“선생님, 저는 특종기사를 써서 유명한 기자가 될 거예요.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아세요? ‘대동공보’ 사무실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선생님, 저는 하얼빈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가며 10월 26일이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그리고 오늘 안중근 선생님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고요!”
“기석아! 기석아! 선생님 이야기 좀 들어봐!”
선생님은 기석이의 양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런 다음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기석이의 손바닥에 내려놓았다. 둘둘 말린 신문이었다.
“어, 이럴 수가!”
신문을 펴본 기석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신문의 첫 번째 면에는 안중근 선생님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봤지? 안중근 선생님의 기사는 벌써 나왔어. 누군가 벌써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기사를 작성했다고.”
선생님의 말을 듣던 기석이는 들고 있던 신문을 툭 떨어뜨렸다. 기석이는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얼빈의 하늘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다. 기석이와 선생님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기석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선생님, 저 배울래요. 우리 아버지처럼 살기는 정말 싫으니까요!”
기석이의 말이 끝나자, 선생님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기석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기석아, 그거 아니? 너희 아버지는 배워야 스스로와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이 길러진다는 걸 아신 분이었어. 그래서 삼흥학교로 찾아와 너를 부탁하셨지. 그런 다음 의병대에 들어가 몸소 나라사랑을 실천하신 분이셔.”
“하지만 어머니가 편찮으신 걸 알면서, 단 한 번도 찾아오질 않았어요.”
“그건 네 오해야. 너희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도 의연한 분이셨어. 네 아버지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며, 본인의 병을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 분이 바로 너희 어머니시지.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내 손을 꼭 붙들고 네가 끝까지 공부를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셨단다.”
갑자기 기석이 눈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선생님은 기석이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기석아, 너 자신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배워야 해. 그리고 배워서 아는 것에 그치면 안 되고, 그걸 몸소 실천하면서 살아야 된단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신 것처럼. 또 안중근 선생님이 그러신 것처럼.”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여기에 오신 거예요?”
기석이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응, 나는 말이야.”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함흥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대동공보’에서도 일하거든.”
“와, 그러면 선생님도 기자예요? 안중근 선생님 기사 쓰려고 오신 거예요?”
“기석아, 선생님은 기자이지만, 하얼빈에는 기사를 쓰러 온 게 아니야.”
“그럼 왜 오셨어요?”
“나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지.”
기석이는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두워진 하얼빈의 하늘 아래에서 선생님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신기했다. 선생님의 눈빛이 하얼빈 역에서 보았던 안중근 선생님의 눈빛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3
기석이가 이숙희 선생님을 따라 뤼순에 온 지 넉 달이 지났다. 그동안 안중근 선생님에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기석이는 안중근 선생님에게 벌어진 일들을 수첩에다가 차곡차곡 적어놓았다.
기석이는 수첩을 한 장씩 넘기면서, 큰 제목들을 훑어보았다.
<10월 26일 늦은 밤, 안중근 선생님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으로 넘겨짐. >
<10월 30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심문실에서 안중근 선생님은 일본인 검사의 심문을 받음.>
<11월 3일, 안중근 선생님이 뤼순 감옥으로 옮겨짐>
기석이가 이번에는 두껍고 커다란 노트를 펼쳐 보았다. 이숙희 선생님이 주신 노트였다. 기석이는 그 노트에다가 안중근 선생님에 대한 기사들을 오려서 붙여놓았다.
사실 기석이는 노트에 붙여놓은 기사들을 읽지 못했다. 청나라, 미국, 프랑스 등의 언어로 되어 있어서였다. 그 기사들의 제목이 ‘나라를 구한 영웅, 안중근’, ‘안중근의 신앙과 생활’, ‘안중근의 저격 동기’ 등이라는 건, 이숙희 선생님이 가르쳐 주어서 알았다.
기석이는 노트 속의 알아볼 수 없는 기사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공부를 해야겠어. 언젠가는 내 힘으로 이 기사들을 읽을 수 있도록!’
기석이는 커다란 노트를 접고, 다시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수첩의 맨 끝에다가 이렇게 썼다.
<2월 14일, 안중근 선생님의 선거공판…….>
그렇다. 어느새 최종 선고일이 된 것이다. 기석이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서 자꾸만 창밖을 내다보았다. 방청객으로 참석한 이숙희 선생님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어떤 선고가 내려질까?’
지금까지 재판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걸 기석이는 잘 안다. 안중근 선생님 가족이 신청한 한국인 변호사, 안중근 선생님의 변호를 자청한 외국인 변호사의 변호는 모두 허락되지 않았다. 안중근 선생님에게 허락된 변호사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뿐이었다.
그런데도 기석이는 마음 한편에다가 희망을 품었다.
‘안중근 선생님께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건, 결코 개인의 복수심 때문이 아니잖아.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잖아. 그러니까 어쩌면, 그에 맞는 판결이 내려질지도 몰라.’
기석이는 뤼순의 매서운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속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기석이는 안중근 선생님을 잠자코 바라만 보던 소년이었다. 하얼빈 역과 러시아 헌병 파견대에서 안중근 선생님을 보았던 10월 26일. 그 당시 기석이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중근 선생님에 대한 특종 기사를 써낼 거야!’
그때 안중근 선생님의 행적은 기석이에겐 기삿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기석이는 변했다. 뤼순에 있는 기석이는 예전의 기석이가 아니다.
창밖을 내다보던 기석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기다리지만 말고 직접 법정으로 가보는 거야!’
기석이는 외투를 걸쳐 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재판장까지 멀지는 않았지만, 기석이는 서둘렀다. 마음이 급한 기석이는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가 날카롭게 얼굴에 닿았다.
‘제발, 안중근 선생님 판결이…….’
기석이는 달리면서도 빌고 또 빌었다.
마침내 재판장 앞에 도착한 기석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다음 숨을 가다듬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한쪽에서 문이 열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기석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숙희 선생님을 찾아냈다.
“선생님! 이숙희 선생님!”
기석이는 이숙희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기석이를 본 이숙희 선생님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서둘러 재판장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다. 기석이는 왠지 불안했다.
“선생님, 어떻게 되었어요?”
“…….”
이숙희 선생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기석이는 별안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말씀해 주세요.”
기석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석아.”
갑자기 선생님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안중근 선생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셨단다.”
“서, 선생님. 어, 어떻게.”
기석이는 너무 놀라 숨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잠시 후 기석이의 어깨가 들썩였다. 어머니가 기석이 앞에서 숨을 거둘 때처럼. 의병대 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기석아, 그래도 안중근 선생님은…….”
이숙희 선생님은 기석이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안중근 선생님은 재판을 하는 내내 당당하셨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논리적으로 본인의 주장을 펼쳐나가셨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어요?”
“어차피 이미 결과가 정해진 재판이었으니까.”
“선생님, 정말 너무해요!”
이숙희 선생님은 기석이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 다음 이숙희 선생님과 기석이는 천천히 걸었다. 오래지 않아 뤼순 감옥이 나타났다. 감옥은 붉은 벽돌 담장이 높았다.
“선생님, 저 안에 계신 안중근 선생님은 어떤 심정이실까요?”
기석이는 길게 늘어선 뤼순 감옥의 담장을 쳐다보았다.
“기석아, 안중근 선생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단다. 그랬기에 그분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할 수 있으셨던 거야. 또 차디찬 감옥에서도 단호함과 의연함을 잃지 않으셨던 거고.”
뤼순 감옥 담장길을 지나던 이숙희 선생님이 멈춰 섰다. 그 앞에 높이 솟은 상록수가 있었다. 이숙희 선생님은 잠시 상록수를 올려다보았다.
“기석아, 나는 사람도 이 나무와 같다고 생각해. 나뭇가지 하나, 줄기 하나가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해도 땅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살 수 없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네가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해도 나라가 없으면 소용없어.”
이숙희 선생님의 말을 듣고, 기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상록수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녹슨 것처럼 붉은 뤼순 감옥의 담장 앞에서, 나무는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기석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랬더니 눈앞에 파란 하늘과 푸른 나무가 들어왔다. 그 사이에서 안중근 선생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또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도 차례로 나타났다.
기석이는 손을 뻗쳐 보았다.
‘안중근 선생님! 아버지! 어머니!’
기석이의 가슴 속에 슬픔이 잠시 밀려왔다. 그러나 기석이는 상록수처럼 다시 우뚝 서기로 했다. 그러자 머릿속에 창가 몇 구절이 떠올랐다. 삼흥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였다.
학도야 학도야 우리 주의는
도덕을 배우고 학문을 넓혀서
삼천리 강산 이 좋은 강토를
우리 학생들이 보전합시다.
우리들은 땀을 흘려 문명부강 하게하고
우리들은 피를 흘려 자유독립 해보세
두려움을 당할 때에 어려움을 만날 때에
우리들의 용감한 마음 일호라도 변치 말고
모든 고난 무릅쓰고 쉬임없이 나아가던
못할 일이 무엇인가 일심으로 나아가세
4
3월 26일. 안중근 선생님이 하얼빈 역에서 거사를 치른 지 다섯 달 째 되는 날이다. 이른 아침, 기석이는 잠에서 깨자마자 이숙희 선생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선생님, 제가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무슨 꿈인데?”
“꿈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갔어요.”
“나들이를 갔다고? 정말 즐거웠겠는데?”
“아니, 좀 이상했어요. 상록수 나무가 울창한 산이 보였는데, 해가 지는 거예요. 깜깜해서 앞이 하나도 안 보였어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 갑자기 산에 있는 나무들이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어요. 마치 전구처럼 말이에요. 나무 하나, 나무 둘, 나무 셋……. 마침내 그 산은 밝게 빛나고, 주위는 환해졌어요.”
“와, 정말?”
“네, 조금 있으니까 어디선가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려왔어요.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죠. 저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신나게 춤을 추었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그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산으로 날아가 버렸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빛을 내는 상록수로 변하는 거예요. 저는 넋을 잃고 산을 쳐다보았어요. 그런데 잠시 후 누군가 또 산을 향해 날아오르는 거예요. 저는 눈을 비비고 자세히 쳐다보았어요. 그랬더니 그게 안중근 선생님이시지 뭐예요? 마침내 안중근 선생님도 빛을 내는 상록수가 되었는데, 그 나무는 그 산에서 제일 크고 밝았어요.”
기석이의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그래. 기석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우리에게 빛을 주는 상록수가 되셨지. 그리고 곧 안중근 선생님께서도 우리를 환하게 빛내줄 상록수가 되실 거야.”
지난 달 사형이 선고되고 나서, 안중근 선생님은 ‘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을 남겼다. 며칠 전에는 빌헬름 신부가 동생들과 함께 면회를 가서, 어머님께서 손수 지으신 수의를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모두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안중근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그러나 그날이 바로 오늘이 될 거라는 건 짐작도 못 했다.
그날 오후, 안중근 선생님의 사형 소식이 들려왔다.
이숙희 선생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석아, 안중근 선생님은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내주신 수의로 갈아입으셨대. 그리고 무릎을 꿇고 10분 동안 기도를 하셨다는구나.”
“안중근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을 잃지 않으셨을 거예요. 나라를 사랑하는 굳은 마음과 평화를 사랑하는 온화한 마음이 한 데 섞인, 그 눈빛을요. 제가 예전에 그 눈빛을 본 적이 있거든요.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말이에요.”
“그래, 기석아. 그러고 보니 그 날도 오늘과 같은 26일이구나.”
“네, 선생님. 제 가슴 속에는 벌써 26이라는 숫자가 새겨졌는걸요? 이제 저에게 26일은 평범한 26일이 아니라, ‘운명의 26일’이에요.”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나라사랑을 실천하신 안중근 선생님의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운명의 26일’이로구나. 그렇다면 내 마음속에도 ‘운명의 26일’을 새겨 넣어야겠구나.”
“선생님!”
갑자기 기석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 이제 삼흥학교에 갈래요!”
이숙희 선생님은 눈에 맺혔던 눈물을 닦아내며, 기석이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저, 거기에서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그래서 ‘운명의 26일’을 실천하는 기자가 반드시 될 거예요!”
기석이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꿈에 보았던 상록수 나무처럼 맑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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